Sunday, May 22, 2011

Uncanny : John Hejduk

영단어 Uncanny는 森政弘(모리 마사히로) 의 로보틱스 이론을 통해 Uncanny Valley 라는 현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를 정확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Uncanny Valley 는 그 유명한 폴라 익스프레스파이널 판타지 더 무비등의 상업적 실패 때문에도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CG나 로보틱스가 인간을 흉내내면 낼 수 록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은 강한 거부감-비호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문장은 많은 곳에서 회자되고 있고, Uncanny (이하 언케니)에대한 대중의 오해도 동시에 사게 되었다. 언케니는 사실, 단지 거부감 뿐만이 아닌,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괴이한" 감정으로, 일본어로는 ”不気味(ふきみ)" 를 쓴다. 노와 같은 가면의 얼굴상은 일본의 문화에 있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아마도 한국에서는 대단히 찾기 어려운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름끼치도록 괴이한 이 느낌은 여러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자주 변주되는, 하나의 미학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심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다수의 논문들도 있다.


건축에 있어서 언케니의 이야기는 Anthony Vidler (이하 비들러) 의 The architectural Uncanny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저서를 통해 비들러는  현대를 무대로 한 언케니의 족적을 다각도로 쫓는다. 문학과 철학, 심리학을 넘나드며 신 구조주의적 형태의 파편, 절단된 신체 -- 사회로부터 소원된 구성원, 이주, 피난, 홈리스와 같은 현대 건축이 놓인 해체 - unsetting - 성에 대한 윤곽을 그린다. 그는 Bernard Tschumi, Rem Koolhaas, Peter Eisenman, Coop Himmelblau, Diller and Scofidio 와 같은 건축가들을, 그리고 건축가 John Hejduk (이하 존 헤이덕)의 마스크 프로젝트에 대해 vegabond - 방랑자 - 마치 유령처럼 떠돌며 어딘가에 놓여 일상의 호흡을 바꾸는 무언가라고 이야기하며, 그것이 도시의 심리적 지도의 균형을 부수는 일시적 장치라 칭한다.

그의 설명은 언케니에 대한 모리의 설명들만큼이나 나로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마스크 프로젝트들은 단지 부유하는 방랑객이 아니라, 건축물로서 도시의 기저에 놓인체 그것을 억압하는 - 혹은 당하는 - 것들과의 불-화합의 증거로서 언제나 (도시에) 존재한다. 마스크들은 그 스스로도 계속해서 도시를 자극하며, 또 환기시키는 종류의 방랑자인 것이다.

비들러의 언케니의 효과는 그 배경이 너무나도 익숙한 것임을 상정한다. 언케니 하게될 가능성을 풍부하게 갖춘 무대는 이 인간을 흉내낸 무언가가 등장함으로서 완전히 다른 연극적 성격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비들러에게는 이런 연극무대와 같은 현실과 비현실의 이분법적 상황을 통해 헤이덕의 마스크들의 완벽한 이해를 구할 수 있을 런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놓이는 헤이덕의 건축은 - 그것이 설령 모방된 진실(마스크)이라 하더라도 - 그 스케일과 물질성으로 인해 현실로 융화되고, 그것을 재차 증강시킨다. 이윽고 연극과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통해, 건축은, 건축적 연극은 무대 - 배우- 관객의 경계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익숙치 않은 배경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배우 (건물)로 바뀌어 이미 새로운 현실의 물리적, 심리적 지도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서구의 연극 무대나 카부키나 노와 같은 특정한 무대- 장치로 구성된 연극의 기억이 희미한 나로서는, 비들러가 제시하는 Uncanny함이건 모리가 이야기하는 不気味さ이건 정확한 감을 갖기가 어렵다. 특히나 헤이덕의 그것은, 건축물이 지닌 무한한 시간과 그 큰 존재감으로 인해 더더욱 어려워 지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로 하여금 존 헤이덕의 프로젝트가 지난 몇 주 뒤에도 계속해서 그의 그림자를 쫓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